기고·동정

기고 풍향계/믿을 건 가족밖에 없지? - 박혜경 대표이사[동양일보- 2023. 10. 04.]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3. 10. 05 조회수 342

박혜경 충북여성재단 대표이사


[동양일보]추석이 막 지났다. “교통체증을 뚫고 부모님을 뵈러 가야 하냐, 굳이 추석에?” 라는 말을 동기에게서 들었다. 추석 전 주에, 혹은 나중에 만나도 되는 가족이지만, 다른 주말엔 늙은 부모를 홀로 두어도 괜찮은데 추석에는 그러기 미안하다. 다들 가는 소풍을 못 가고 남겨진 아이처럼 우리 부모가 버려진 느낌이 들까 봐.

실제로 명절에 여행 가는 이들이 점점 많아졌다. 그건 어행에 부모와 함께 하거나 다른 형제들에게 부모를 맡길 수 있거나 부모가 나름대로 시간을 즐길 만큼 젊다면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명절에 나이든 부모만 남겨두고 자식들이 모두 여행을 떠나버리기는 쉽지 않다.

장수가 축복이라고 믿어 왔지만, 장수가 불러온 세상은 고령화로 고민 중이다. 의학과 기술도, 영양도. 우리의 욕망도 기대수명을 늘이고 있다. 노인인구가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면, 점점 오래 살게 된 세상의 인간관계와 사회시스템, 가족문화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믿을 건 가족뿐’일까?

고령화로 인한 사회변화로 연금제도 변화가 대개의 큰 관심사지만, 가족관계도 달라진다. 재산상속 풍경도 변화한다. 70세가 넘어야 재산상속을 받는 경우들이 적지 않다. 돈이 한창 많이 필요한 때를 지난 다음이라 곧 자녀에게 증여하거나 상속하기도 한다. 재산을 미리 좀 주면 좋았으련만 노부모 입장에선 미리 줄 수도 없다. 이래저래 조금 서운한 감정들이 떠돈다. 대다수는 퇴직 후 국민연금 얼마에 기초노령연금으로 살아가면서, 90세 전후의 부모를 돌봐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한다. 지금의 중고령 세대는 부모로부터 재산을 상속받기는 어렵고 부양의 의무에서는 벗어나지 못한 세대다.

문제는 돈만 아니다. 며느리며 사위를 보고나서도 90대 부모를 뵈러 명절에 가야 한다. 명절에 부모에게 안 가기도 그렇고, 사위 며느리까지 데리고 가자니 자녀들 부부 사이에 다툼을 일으킬까 봐 눈치가 보인다. 노부모는 홀로 된 경우가 많으니 더 딱하다. 6,70대는 아직 자식노릇하느라 부모대접을 제대로 누려보기 어렵다. 이 풍경이 어버이날에도 성탄절에도 되풀이된다.

결혼을 안 하거나 돌싱인 형제자매가 있다면 부모를 맡기기도 한다. “사위며느리 보고나면 나는 명절 때 (부모)집에 안 간다,”고 선언하는 게 꽤 일반적인 일이 되었다. 이 결과 홀로인 형제들은 중고령 시기부터 노인 돌봄을 떠맡다가 부모님 사후에는 독거노인이 된다. 길고 긴 노인가구의 삶을 사는 것이다. 결혼 안 한 형제, 특히 딸이 그 역할을 많이 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비혼 딸의 노부모 독박 돌봄이 새로운 가족현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가족변화는 여러 원인들에 의한 것이지만, 고령화만 하더라도 경제적 부양도 정서적 관계도 전통적인 가족의 틀 안에서 충족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미 국가, 지역사회 등 돌봄의 네트워크가 가족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행위자들이다. 돌봄을 위한 관계들이 가족을 넘어 더 널리 상상되고 가동되어야 한다. 이 숙제를 풀지 못하면, 유한한 시간과 물적 자원을 나누느라 가족은 너무나 어려운 갈등의 격랑에 휩쓸릴 수 있다. 이런 갈등이 상상되는 비극적인 가족사건들이 이미 연일 보도되고 있기도 하다.

올 추석 연휴에 선배들이 밤줍기 소풍을 가자고 불러내었다. 모시송편을 갖다 주겠다고 연락한 지인도 있다. 가족이 아니더라도 함께 밤 줍고 모시송편을 나눠 먹을 수 있는 유대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돌봄의 손길이 점점 더 많이 필요해지는 고령화 시대에 생존을 위해서는 ‘믿을 건 가족뿐’이란 생각을 넘어서야 한다. 그러려면 시간과 자원을 ‘가족 너머’의 관계와 나누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관계는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믿을 건 가족밖에 없다는 생각이 역설적이게도 명절을 가족 때문에 외롭고, 죄책감 들고, 분노에 휩싸이게 할 수도 있다. 오래 사는 세상이니 달라지고 있는 가족풍경에 맞게 다양한 유대관계를 만들면 좋겠다.

출처 : 동양일보 (dy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