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동정

기고 풍향계/그 손녀가 집안일에 손 하나 까딱 않는 이유 - 박혜경 대표이사[동양일보- 2023. 6. 7.]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3. 06. 09 조회수 462

박혜경 충북여성재단 대표이사


[동양일보]아들며느리와 함께 사는 동네 어르신 이야기를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이십 대 중반이 된 손녀가 설거지며 집안일에 손 하나 까딱 하지 않는다며 ‘게으르고 이기적인 손녀’를 흉보는 이야기였다. 푸념을 전해 들은 처음 몇 번은 소위 ‘요즘 애들’ 걱정을 하며 그 어르신 불만에 동조했더랬다.

하지만 정보가 더 쌓이면서 그 손녀 이야기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 댁은 시어머니, 아들 부부, 두 명의 손자와 한 명의 손녀, 총 여섯이 살고 있으며, 손자녀들은 모두 학생이고 맞벌이 부부가정이다. 아침에 며느리가 밥이며 반찬을 잔뜩 해 놓고 출근했다가 저녁에 돌아와 종일 쌓인 설거지와 저녁 준비를 한단다. 밥, 설거지, 청소, 빨래에 그 집 가족 누구도 참여하는 사람이 없이 그 모든 일이 어르신의 며느리, 즉 그 손녀의 어머니에게 맡겨져 있다. ‘게으르고 이기적인 손녀’ 사례의 배경에는 두 개의 일터를 오가며 분주한 여성의 삶이 있었다. 여성에게 돌봄이 전가되어 있는 현실이 그 손녀의 행위가 일어난 사회적 맥락인 것이다.

이런 환경은 시어머니가 보기에는 며느리 외의 유일한 여성인 손녀가 집안일을 거들어야 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상상과 추론을 펼쳐본다. 게으름을 타박 하는 가족들에게 그 손녀는 “왜 나한테만 그래!”라며 외친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손녀는 어머니의 독박 돌봄을 거들면 여성에게 돌봄이 전가된 현실을 대물림 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할 것이다. 아버지처럼, 남동생들처럼, 자신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음으로써 여성에게 전가된 돌봄체계의 맥을 끊으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손녀가 가족들에게 함께 집안일을 나누자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어떤 대답을 들었을까, 특히 같은 편이어야 할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네 말이 옳다”는 동조가 아니라 “남자들이 뭐를 할 줄 알아. 네가 여자니까 네가 해야지”라는 대답을 얻지 않았을까. 그 어르신이 손자는 놔두고 손녀만 게으르다고 흉보시는 걸 보면 이 상상이 그럴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그 손녀는 게으름을 떨 궁리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는 것이 여성의 돌봄독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합리적 방법이라는 생각을 은밀하게 굳혀가고 있을 것 같다.

여성에게로의 돌봄전가는 단지 집안 이야기만 아니다. 그 손녀들은 직장 점심에 앞앞이 수저를 놓고 물을 따라 주는 것을 하지 않는 여직원은 기본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식의 평가를 받게 되는 것에 분노한다. 돌봄이 여성에게 더 많이 기대되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한다면, 스스로 나서서 누군가를 수발하고 거드는 여성의 인간적 덕을 칭송만 할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 돌봄 전가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있는지 직시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돌봄을 여성에게 전가한 것만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또한 평가절하해 왔다.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냐 반문이 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쩌랴, 아직도 “집에 가서 애나 봐라,”가 모욕의 말로 쓰이는 세상이니. 돌보는 일은 저급한 일이고 돌보는 사람은 지위가 없다. 직장에서 기혼여성 근로자에게 직함과 상관없이 기분 나쁠 땐 아줌마, 기분 좋을 땐 여사님이라고 부른다. 결혼한 여성들은 공적 지위와 상관없이 일차적으로 모두 ‘주부’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여성은, 무엇보다, 돌보는 사람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월급은 없이 숙식만 제공하며 부려 먹던 70년대 이른바 ‘식순이’의 역사로부터 돌봄의 성별, 계급별, 나아가 인종별 분배의 역사와 현실이 존재한다. 돌봄의 가치절하가 불균형한 돌봄 분배의 원인이고 결과다. 아동도 노인도 돌볼 사람이 없어 돌봄공백을 걱정하고 이로 인한 저출산 등으로 사회가 멈추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사회에 퍼지고 있다. 이런 걱정을 한다면서, 여전히 외국인 가사근로자를 최저임금 이하로 부려먹을 방법을 찾는 정책주장이 일부 있다. 돌봄 회피가 왜 일어나는지 기본적인 이해부터 부족한 얕은 발상이다.



출처 : 동양일보 (dy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