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동정

기고 풍향계/여자들의 의리 - 박혜경 대표이사[동양일보- 2023. 04. 09.]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3. 04. 17 조회수 452

박혜경 충북여성재단 대표이사

[동양일보]“여자의 적은 여자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여성들은 질투심이 많아서 그렇단다. 남녀의 일과 영역이 분리된 사회에서, 여성은 여성끼리 남성은 남성끼리 갈등하게 되는 건 당연하다. 더욱이 오랫동안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사회적 지위를 얻어왔는데 이런 배경에서 여성들 간의 지위 다툼이 남성과의 관계를 향한 것으로 오인되고, ‘질투’라는 감정싸움으로 격하되고 사사롭게 여겨져 온 것이다.

요즘에는 여성 직장상사와 부하직원 간의 관계를 두고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식의 말이 재생산되기도 한다.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여가 늘어났지만, 여성들이 특정 산업과 직종에, 한 회사에서도 특정부서에 몰려 있는 경향이 있다. 노동시장의 성별분리 또는 유리벽 현상이다. 승진이나 성과평가를 위해서 여성들끼리 경쟁한다. 유리천장 현상, 즉 여성을 위한 승진기회가 제한되어 경쟁은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남성이 다수를 차지하는 직장들이 많지만 ‘남자들 간의 갈등’ 따위의 말은 없는데, 여성이 다수인 조직에 대해서는 ‘여자들끼리의 갈등’이니 ‘여자들만 있는 조직의 특성’이니 하는 말들이 따라다닌다. 구조적 환경 때문에 여성들끼리 경쟁하는 것이지 여성이기 때문에 경쟁하는 것도, 더욱이 질투하는 것도 아니다.

여자들은 의리가 없어서 잘 모이지 않는다고도 한다. 그래서인지 여학교 동창회는 잘 안 된단다. 내 주변에도 자신의 여고 또는 여대 동창모임보다 남편 동창회 등 모임에 열심히 참여하는 여성들이 있다. 모 대학 교수부인 모임도 본 적이 있다. 부부 나들이 겸 남편의 사회적 성공을 위한 내조의 기능을 가진 모임일 것이다. 여성의 편에서 보더라도 사회적으로 힘 있는 남성들의 네트워크에 기대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십 여 년 전 모 여대에서 ‘사위의 날’ 행사를 한 적이 있다. 학교 기금확충을 위한 자리였다. 후원금을 낼 정도의 부를 축적했을 연배의 동창들은 스스로가 출세는 못 했고 출세한 남편의 부인들이 되었기 때문에, 동창모임의 주인공이 여성졸업생들이 아니라 그 남편이 되었다. 힘을 가진 자들의 연대가 그들의 심성적 미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듯이, 힘 없는 이들의, 또는 여성들의 연대가 어려운 것이 여성의 질투심이나 본성 때문이 아니다. 사회적 권력 없음이 네트워킹이 어려워지는 이유이다.

하지만 권력을 목적으로 한 연대만 아니라 생존을 위한 연대도 있다. 빈곤한 동네에서는 남의 아이 끼니도 챙겨주고 모자란 세간살이도 빌려 주는 이웃 간의 도움 없이는 생존 자체가 어렵다. 특히 70~80년대를 살아 본 한국인이라면 저마다 이러한 기억 한 두 토막쯤은 넉넉히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여성들의 낮은 사회적 지위를 바꾸기 위한, 즉 여성의 사회적 생존을 위한 연대 역시 존재해 왔다. 1980년대 모 투자신탁회사에서 결혼과 임신을 이유로 여직원을 해고하려 한 사건이 있었다. 결혼퇴직각서, 임신퇴직각서를 쓰고 입사해야 했던 시절에 한창 일어났던 일이다. 긴 싸움 끝에 회사의 사과와 원직복직을 얻어냈다.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 당사자와 여성단체의 노력이 있었지만 그뿐만 아니었다. 경제적 여력이 있던 여성들이 그 신탁회사의 지부를 돌며 거액을 맡겼다가 여성노동자에 대한 결혼퇴직 압력에 항의하며 돈을 도로 찾곤 하는 일을 계속 벌였고 이에 회사가 끝내 항복했던 것이다.

주동자 여성들에게 그 행위는 여성운동 하는 친구를 돕는 일이었고, 여성으로서의 연대였다. 피해당사자 여성이 임신한 몸으로 모욕과 압력에도 버텨 낸 것은 자신을 위해서이기보다 (버티는 걸 가족이 원망할 정도로 여성 당사자의 삶은 만신창이에 가까워졌었다) 후배 여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모두 여성의 사회적 생존을 위한 연대이자 의리였던 것이다.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한 노력에 남성의 참여와 연대 역시 중요한 기여를 해 왔다. 하지만 여성들의 의리가 없었다면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오늘 만큼에 이르지 못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여자의 적은 여자다, 라는 말은 인식론적으로 오류이고 역사적으로 거짓이다.



출처 :  동양일보 (dy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