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동정

기고 풍향계/필요한건 진짜 마음 - 박혜경 대표이사[동양일보- 2023. 1. 18.]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3. 03. 22 조회수 530

박혜경 충북여성재단 대표이사

[동양일보]결혼식 등 남의 애경사에 부조금을 얼마를 해야 하는지 세심하게 따지는 세상이다. 당사자와의 관계, 나의 애경사에 받은 부조금 액수, 식사를 하는지 마는지 몇 명이 하는지 등이 기준으로 거론된다. 내가 손해를 보지도, 상대에게 모자라게 하지도 않겠다는 것이 고민의 핵심이다. 야박한 세태구나 하는 생각이 완전히 떨쳐지진 않지만, 이 상호부조의 원리가 다시 정비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산업화된 도시에 살면서 남녀 모두 인간관계가 복잡해졌다. 평균 학력도 높아져 동창관계도 많아졌다. 종신고용 모델도 깨져 여러 직장을 통해 길거나 짧은 직장동료 관계들이 만들어졌다. 어디까지 애경사 소식을 주고받아야 하는지 그 범위를 따지는 것이 어려워졌다. 일차적으로는 내가 부조금을 받았거나 주었던 사람들이 이 명단에 들어간다. 하지만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런 상호성이 모든 관계에서 지켜지지는 않는다. 받기만 하는 관계도 있고, 주기만 하는 관계도 있다. 요즘에는 상호성이 없는 부조금 문화는 조금씩 약해지고 있는 듯하다.

전형적인 생애주기가 사라진 것도 상호성을 한층 더 복잡하게 한다. 요즘엔 누구나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생애주기 모델을 기반으로 한 상조회는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부모상 외에는 일생의 대소사라 할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재혼, 삼혼의 경우도 늘어났으니. 초혼 때 축의금을 냈는데, 재혼, 삼혼 때도 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이 때문인지 상조회는 많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상호성의 원리는 처세를 위한 부조에서는 작동하지 않으니 또 한층 어렵다. “얼굴 도장 찍기” 위해 행사에 참여하고 부조금을 낸다. 상호성의 원리를 따지는 것도 어려운데 이마저도 작동하지 않는 관계라니. 부조금은 상호성에 기반을 둔 것 같아도 사회의 복잡성 증가에 따라 복잡한 판단을 필요로 하는 문제가 되었다.

그러니 사회 변화에 맞추어 부조금 문화도 달라져야 한다. 결혼하지 않겠다는 친구에게 독립거주 공간마련을 축하하는 부조와 의례 참여 등 전형적 생애주기 붕괴와 생애양식 다양화에 맞춘 문화창조가 필요하고 또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연애결혼이 규범이 된 시대에 결혼식에서는 여전히 부모가 혼주 노릇을 하니 결혼식의 규모와 방식에 부모 의견과 사회관계망이 큰 영향을 미친다. 결혼식 하객이 결혼당사자의 얼굴을 결혼식에서 딱 한번 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결혼식 부조금은 부모를 보고 내는 것이지 당사자를 위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게 아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결혼은 마을 공동체에 일원이 새로 들어오는 일이므로 혼인잔치를 통해 함께 음식을 나누고 인사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 사회는 달라졌으니 결혼식도 축의금문화도 달라져야 한다.

친밀성은 돈의 액수로 가늠되기도 한다. 법철학자 비비아나 젤라이저가 가족간의 송사를 분석하여 <친밀성의 거래>라는 책에서 주장한 원리이기도 하다. 돈의 액수는 그만큼 중요하다. 하지만 애경사 부조금에서 돈의 액수를 따지느라 더 중요한 도움과 협동의 마음이 잊혀지고 있는 게 아닌지 염려스럽다. 사람마다 경제적 형편이 똑같지 않은데 상호성의 원칙이 부조금 액수가 같아야 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다들 보살피는 마음으로 부조를 할 것이다. 부조금을 두고 따지는 것은 슬픔과 기쁨 같은 진짜 마음을 나누는 관계 너머까지 애경사 소식을 알리고 초대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부조금에서 명확한 계산법보다 더 시급하고도 중요한 것은 돈은 오가되 마음은 없는 민망한 상호부조관계를 끊는 것이다. 진짜 마음만 남는다면 지금처럼 행사가 이렇게 클 수 있을까 의심한다. 결혼식에는 진짜 기쁜 마음만 모이고 장례식에는 진짜 애도만 있는, 진짜 마음의 세상이기를.

출처 : 동양일보 (dy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