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동정

기고 풍향계/좋은 게 좋은거라니 - 박혜경 대표이사[동양일보- 2022. 11. 17.]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3. 03. 22 조회수 531

박혜경 충북여성재단 대표이사


[동양일보]좋은 게 좋은 거란 말은 참 이상하다. 사실 좋지 않은 것도 좋은 것인 양 받아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한테 좋은 게 너한테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 주면 안 되겠어?” 이 말이다. 부드러운 말처럼 들리지만, 무비판적인 태도를 종용하는 말이거나 심한 경우엔 타인을 억압하는 말도 된다. 더욱이 상대방의 처지를 잘 모르면 나한테 좋은 게 너한테도 좋은 것이란 생각은 터무니 없는 경우가 많다. 세상의 중심에서 살아와서 자기를 증명해야 하는 고군분투의 경험이 적은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이 모두의 경험이 아니란 것을 잘 모른다.

20여 년 전 수도권의 규모가 큰 공공기관에서 일할 때 일이다. 장기근속 직원에게 주어지는 특별휴가제도가 있었다. 일 주일의 휴가에다 휴가비까지 두둑히 챙겨주는 제도였다. 그런데 그 혜택대상은 본인과 배우자로 한정되어 있었다. 장기근속을 하고도 배우자가 없는 직원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곤란해졌다. 마침 결혼하지 않은 여성직원이 그 대상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임원회의에서 그 규정의 혜택대상을 ‘본인과 본인 외 1인’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기근속을 격려하기 위한 제도가 그 수혜대상자의 사적인 관계까지 구속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주장의 근거였다. 하지만 회의에 참석한 중간관리자들은 박선생이 결혼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주장하는 거라며 웃었다. 하지만 결과는 내 의견대로 되었다. 논리에 설득되어서라기보다, 한 남성직원이 “어, 맞네? 나는 내 딸 데리고 여행 가고 싶은데” 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그 중간관리자들은 모두 기혼자였고 남성이었다. 그들은 처지가 같은 기혼 남성 중간관리자의 주장에는 수긍을 했다. 다른 직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기 때문이기보다 자신에게도 있을 수 있는 경우를 상상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본다는 건 이렇게 어렵다. 며칠 뒤에 한 여성직원이 내게 고맙단 인사를 했다. 덕분에 부모님을 모시고 장기근속자 휴가를 다녀올 수 있었다고. 부모님 중 한 분 몫만 비용을 대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공공기관의 건물을 리모델링하면서 숙직실 옆에 여성휴게실이 생겼다. 시설에 대한 직원들의 건의를 더 받는다기에 나는 여성휴게실을 고쳐 달라고 했다. 여성 휴게실에는 의자와 테이블만 몇 개 있었는데 그 방의 절반을 전기온돌을 깔아 달라고 했다. 돈이 많이 든다고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옆방 숙직실에는 전기온돌이 전체에 깔린 걸 본 터라, 계속 필요를 말했다. 생리기간 동안 따듯한 곳에서 허리를 덥혀야 하는 여성들이 있어 여성휴게실에 의자만으로는 아쉽다고. 결국 여성휴게실에도 절반의 온돌방이 생겼다. 특히 새벽에 나와 일하고 잠깐 쉴 곳이 필요했던 청소직원들이 고마워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 전에는 화장실 한 칸을 비집고 앉아 뼈마디를 쉬었던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사납게 주장하지는 않았다고 스스로는 생각하지만, 중뿔나게 군다는 뒷말도 누군가는 했을 것이다. 의사결정 단위에 유일하게 있는 여성이었기 때문에 내가 꼭 그런 이야기를 짚어는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더랬다.

그 조직에서 정규직 박사연구원들에게 1인 1실을 주고 방을 남쪽으로 배치했는데, 그러는 통에 그들이 방문을 닫으면 비정규직 석사연구원들은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나는 그 석사연구원들 방의 복도에 면한 쪽에 창을 내달라고 건의했다. 그 건의는 받아들여졌지만 복도에 사무실 창문이 생기니 학교 같다고 높은 분이 불평하셨다고 전해 들었다. 그래도 비정규직의 처지에서 사무실 환경에 대한 건의를 적극적으로 하기 어려웠을 석사연구원들에게는 좀 나은 환경이 되지 않았을까.

글을 쓰다 보니 스스로 잘 한 이야기를 자랑하려는 것처럼 되어 민망하다. 남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여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른 이야기는 더 많다. 다만 지면이 모자라 나중으로 미룰 뿐이다. 의사결정 단위에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이 반영되도록 구성되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 사람들을 다 모을 수는 없으니 성별을 포함하여 다양성에 대한 감수성이 필요하다. 그것을 기르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중심에 선 사람들만의 세상으로 흘러갈 것이다.

출처 : 동양일보 (dy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