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동정

기고 풍향계/어른 음식 먹기 - 박혜경 대표이사[동양일보- 2022. 10. 19.]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3. 03. 16 조회수 448

박혜경 충북여성재단 대표이사


[동양일보]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이 왔다. 먹거리가 풍성해지는 계절이니 먹는 것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모든 인간은 아이로 태어나서 어른으로 성장해야 한다. 어른이 되려면 음식도 어른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 몸의 성장을 위해서만 아니라 마음의 성장을 위해서도 그러하다. 음식에 애, 어른이 있겠냐고? 있고 말고다.

미국에 몇 년 머물던 시기부터 이런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었다. 내가 본 바로는 미국의 수퍼마켓 마다 냉동음식 진열장의 규모가 엄청났다. 놀라웠다. 대부분 달고 짜게 반조리된 육류음식들이 그 안을 채우고 있었다. 식당 음식에 비하면 가격도 엄청 쌌다. 미국 가정에선 거의 요리를 하지 않는다고 흉 보던(자기도 거의 하지 않던) 미국인 동료의 말이 그렇겠구나 싶었다. 시간도 돈도 여의치 않은 경우엔 그런 음식으로 살겠구나 싶었다. 그 음식들이 대부분 아이들이라면 좋아할 입맛에다 육류 중심이라 영양과 건강 면에서 좀 걱정스러웠다.

식당에서도 사정은 썩 달라 보이지 않았다. 점심 무렵 동네 식당의 야외 테이블에 아이와 아버지가 커다란 햄버거와 거의 양동이 만한 콜라 컵을 하나씩 앞에 두고 앉아 있던 모습은 잊히지 않는다. 양도 양이지만 어른과 아이가 똑같은 음식을 먹다니. 아이 때 먹던 음식을 어른이 되어서도 그대로 먹어도 될까?

한국의 아이들도 어릴 땐 햄버거와 피자를 좋아한다. 나이 들면서 밍밍한 버섯 맛도, 흐물거리는 가지 맛도, 열심히 씹어야 하는 나물 맛도 알게 된다. 음식에서 맛뿐 아니라 영양도 중요하단 것을 배운다. 과식도 음식을 버리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절제도 배운다. 이러한 변화는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부모의 밥상머리 교육도, 유치원과 학교의 선생님들의 식사지도 노력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어릴 적 콩을 먹기 싫어했는데, 아버지가 열 알만 먹으라고 콩을 조르르 놓아주던 것이 기억난다. 열 개의 콩이 줄 서 있는 것이 귀여워서 놀이인 양 먹었다. 어떤 때는 한 입만 먹어 달라는 애원에 선심 쓰듯 한 입 먹어 준 음식들도 있다. 대개 몸에는 좋으나 어린 아이의 입맛에는 당장은 맞지 않던 ‘맛없는’ 음식들이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 입에 단 음식만 아니라 때론 쓰고, 질기고, 밍밍한 맛도 몸에 좋으면 좋은 음식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으리라. 음식을 먹으면서도 삶에서도 당장 자극적인 즐거움만 아니라 때론 쓰고 지루한 시간을 견디기도 해야 한다는 걸 배우게 되는 게 아닐까 한다.

아이가 자극적인 아이 입맛에만 맞는 음식이 아니라 몸이 자라면서 점점 어른의 음식에 맞는 입맛으로 바뀌어 가도록 옆에서 가르쳐 주고 애써주는 것이 필요하다. 어른에게는 이러한 시간이 있어야 한다. 시간복지가 정말로 중요하다.

어느 덧 우리네 밥상도 냉동식품과 반조리식품, 배달음식으로 채워지고 있다. 맞벌이가 늘면서 당연한 현상이다. 집에서 꼭 음식을 해 먹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 음식들이 몸과 마음에도 알맞은 자기양생의 격을 갖추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어른의 음식 먹기는 음식과 내 몸과 마음의 관계, 나아가 내가 먹는 음식과 사회와 지구와의 관계까지 돌아보는 것이다.

충북여성재단은 올해 ‘할아버지의 부엌’ 사업을 처음 시작했다. 시군 지역으로 다니며 60세 이상의 남성들에게 요리법과 자기돌봄의 가치, 영양상식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이다. 도시의 젊은 남성들이 ‘요섹남’으로 거듭나는 동안, 지역의 나이든 남성들은 ‘삼식이’로 방치되고 있다. 가사노동을 여성의 일로 치부해 온 사회에서 남성노인은 귀찮은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할아버지의 부엌은 라면이나 막음식으로 지낼지도 모르는 남성노인들에게 자기돌봄, 사회참여, 성평등, 지구돌봄의 맛도 알게 하는 어른 음식 먹기의 일환이고자 한다.

출처 : 동양일보(http://www.dynews.co.kr/)